2009년 7월 10일 금요일

보고싶은 짱구삼촌

어제 새벽,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신문 하나를 보여주셨다.

엄마가 신문을 던져줄 때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담긴 기사이거나,

공부 열심히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가 담기 기사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번 기사는 정말 뜻밖의 기사였다.

 

열심히 페이지를 뒤적거리시더니 아무말 없이 눈 앞에 보여주셨다.

 

기사 사진에는 아주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항상 짱구삼촌이라 부르며 내가 제일 좋아했던 삼촌.

너무 어렸을 때라서 많이 기억이 나진 않지만

할머니댁에 놀러갈 때마다 재밌게 놀아주셨다.

 

하지만, 이 장면은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5살 때 였을 것이다.

 

어느 날 할머니 댁엘 갔는데

할머니는 집 앞 마당에 앉아 하염없이 울고 계셨고,

집안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평소에 술도 안마시는 애가, 왜 술을 마시고 발을 헛딧었다는거야!!"

 

할머니가 외치던 소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때부터 삼촌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짱구삼촌은 돌아가셨고,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리고 내가 20살 때 집이 이사를 하다가

오래된 사진을을 찾았었는데,

그 중 너무 웃기게 찍은 사진이 하나 있었다.

찢어진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찍은 사진이었다.

 

 

아빠는 사진을 보면서, 이게 누가 찍어준 사진인지 아냐며 물었다.

"아빠가 찍은거 아니야? 이게 할머니네 집인건 알겠는데,,,"

분명 맨날 창호지 찢어먹는다고 사촌오빠랑 할아버지에게 수도 없이 혼났으니,

그 문을 기억못할리는 없었다.

 

"짱구삼촌이 찍은거야"

 

그때 순간 잊었던 삼촌이 기억난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아빠에게 참 많은 얘기를 들었다.

삼촌이 얼마나 똑똑한 학생이었는지, 어떤 일을 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

 

그 이후로 사진을 볼 때마다 삼촌생각이 났다.

어떻게 놀아줬는지도 기억이 났다.

 

그리고 다시 4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삼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난 것이다.

 

삼촌에게 참 많이 미안했다.

 

이렇게 세상이 삼촌을 기억하는데, 난 기억하지도 못했다.

 

이제 곧 있으면 삼촌 기일이다.

벌써 돌아가신지 19년이나 되었다.

삼촌이 살아계셨다면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되셨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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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사회를 바꾼다]

5.종교 - 사회참여 이끈 이정주

종교·종파 초월 화합의 리더십 보인 '기독청년'…교회 거점으로 민주화·인권운동 앞장

작성 : 2009-07-05 오후 7:19:01 / 수정 : 2009-07-05 오후 9:56:03

전북일보(desk@jjan.kr)

1980년대 전북지역 기독교 청년운동을 주도했던 이정주는 30세에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탓에 자료가 드물다. 사진은 7주기 추모예배 순서지 표지.

어느 시대에나 사람은 귀하다. 특히 사회운동영역에서 올곧은 지도력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가 어수선하고 합리적인 것이 통하지 않는 사회일수록 중심을 잡아주는 어른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지금 그렇다. 이런 면에서 인간 이정주는 선후배 모든 층에서 인정하는 지도력과 능력, 인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30살의 짧은 인생을 마감함으로 인해 이정주에 대한 자료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이정주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취재 중에 느낄 수 있었다.

자기주장이 강하면서도 끝까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합의를 이끌어 낼 줄 아는 사람, 종교·종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만나면 하나밖에 없는 옷도 벗어 줄 사람, 불의를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 들었던 사람. 이정주를 아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말들이었다.

이정주는 1961년 전북 진안군 백운면에서 목수 아버지 밑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이정주는 가정의 어려움을 늘 걱정하면서도 군부독재와의 투쟁에 늘 선봉에 서 있었다. 처음 시위에 참여한 것은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민주화 세력들을 말살하려 했던 80년 광주민중항쟁 시위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신흥고 학생 신분으로 시위에 참여하면서 사회변혁에 대한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후 전북대 사범대에 입학해 이 사회를 바르게 이끌고 가정의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방안으로 선생님의 꿈을 꾼다. 하지만 사회상황은 얌전히 학교생활에 전념하면서 교사가 되겠다는 이정주의 꿈을 내버려두지 않게 했다.

졸업 전 이미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면서 사회변혁의 최전방에서 활동을 더욱 뿌리 깊게 자리를 잡는다.

이정주는 신앙심이 깊어 남문교회에 출석하면서 다양한 활동도 한다. 교사활동을 비롯하여 교회의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교회 내에서 어른들의 사랑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이는 불의의 사고로 숨진 이정주를 교회가 나서서 교회장으로 치른 것으로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당시 운동권이 극심한 탄압을 피해 교회로 들어가 합법적인 활동을 보장받는 상황에서 그는 신앙에 뿌리를 갖고 활동의 근간을 만들었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군사독재 시절에는 대학교나 사회에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운동권 학생들은 학내에서 뿐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사찰을 받아야 했고 개인의 움직임까지 파악되던 시절로 사람들이 모여 학습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쉽지 않았다. 유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래서 교회는 운동권 학생들의 피신처로, 사회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교회의 대학부 활동에 참여해 학습도 하고 유인물을 만드는 일(그 당시에는 유인물을 등사기로 밀어 출판)은 장비도 문제려니와 이를 할 만한 장소가 교회말고는 마땅치 않았다. 전북지역에서는 그 역할을 남문교회가 중심적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는 기독교운동이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 즉 학생운동,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시절이었다. 전북에서는 남문교회를 중심으로 지역의 운동권이 학습을 하고 지도력을 길러내고 적절한 현장에 배치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후 유화국면을 맞이하고 약간의 민주화가 되면서 교회에 출석하던 많은 운동권 출신들이 그냥 나오지 않았던 현상도 크게 일어났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는 달리 이정주는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중심으로 꾸준한 활동을 펼친다. 그의 활동의 이력을 보아도 얼마나 교회에 뿌리를 깊이 뒀는지 알 수 있다. 1986년부터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북연합회 총무를 지냈으며, 전주기독청년협의회(EYC) 총무, 전북인권선교협의회 간사, 사무국장, 전북기독교사회운동연합 사무차장, 전북민족민주운동연합 중앙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할 당시에도 강릉에서 전국 인권위원회 세미나를 참석하고 있었다. 이정주는 이 세미나에 참석다가 방조제에서 발을 헛디뎌 실족사했다.

이정주는 기독교 운동권은 물론 일반 운동권 학생들의 진로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중간자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선배와 후배들의 가교역할을 하면서 끈을 연결해 주는 지도력이었다. 차분하면서도 마음이 여리고 강렬한 인상보다는 존재하면서 향기를 풍기는 불상처럼 그런 인상을 주어 아동만화의 캐릭터를 닮았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80년대 전북지역사회에서 커다란 획을 그었던 이정주는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여 선후배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이를 위해 전북지역사회가 노제를 지내고 민주장으로, 교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름으로 그의 짧은 활동을 기념하였다.

※ 자료에 도움을 주신 분들 김영기(참여자치 전북시민연대 집행위원장), 김남규(참여자치 전북시민연대 사무처장), 노병관(예림조경 대표)

/이근석 NGO객원기자(전북의제21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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